필자는 공부를 많이 안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수업이 없다. 학생 때도 열심히 놀라던 기억 만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3학년까지 오전 오후반이 있어서 땡땡이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자주는 있는 일은 안이었지만 오전반이면 오후반이라고 하고 놀고, 오후반이면 오전반이라고 해서 놀았다. 100원이 있으면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TV와 만화를 보고 없으면 없는 데로 친구들하고 놀았다.

  중학교가서도 마찬 가지였다. 학교가 걸어서 한 시간 이상 되는 거리였지만 친구들과 걸어 다니면서 놀았다. 당시에는 축구공이나 찜뽕 공이나 테니스 공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놀 수 있었다. 고등학교부터는 동네를 벗어나서 놀았다. 친구들과 텐트를 짊어지고 동네를 벗어났다. 대천해수욕장이나 강촌이나 양수리 등등으로 놀러 다닌 것이 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동네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학교의 경계를 벗어나서 친구들을 만나 것도 이 때였다. 서클 활동을 통해서 만나기도 하고 도서모임을 하러 다른 학교에 가기도 했다. 가끔 빵집에서 맘모스 빵을 먹으면서 미팅을 했던 기억도 있고, 분식집 이층이나 짱께 집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셨던 기억도 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 년 죽으라고 공부하고 대학을 갔지만 또 바로 놀게 되었다. 당시 대학 캠퍼스에는 사복경찰들이 쫘 갈려있었다. 입학 한지 얼마 안 되는 4월  어느 날 공부한번 해보려고 도서관에 간 것이 잘못이었다. 갑자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과 비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자선배 한명이 경찰들에게 개 끌리듯이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모여 있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경찰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교내를 돌았다. 나도 어느새 그 학생들의 대오에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는 놀게 되었다. 세미나도 하고 농활, 공활 등등 나름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학교는 잘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공장으로 갔다. 어차피 갈 공장을 참 어렵게 갔다.^^

  공장에서 하는 일이 노동자들과 술 먹고, 동아리조직하고, 노조 만들고, 파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부도 했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눈에 뛰는 노동자들하고 학습 소모임을 구성한 것이다. 나름 의식화 과정으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근로기준법부터 노동자란 누구인가 등등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초기에는 강의 중심으로 진행하다가 나중에는 텍스트를 정해서 읽고 발제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수업이 생겼다.

  텍스트를 ‘초보자를 위한 자본론’으로 정했다. 시작하면서 책 첫 페이지에 나오는 칼 마르크스의 사진을 보고 노동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걱정했다. 그런데 웬 걸 “이 아저씨 누구냐? 되게 멋지게 생겼다.”는 반응이었다. 같이 세미나를 하는 노동자들 중에 아무도 칼 마르크스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세미나는 잘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멋있는 아저씨가 오른 소리만 하니 귀에 잘 들어 올 수밖에.


<거름 출판사의 "초보자를 위한 자본론"표지와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칼 마르크스의 사진>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다들 열심히 준비해 오는데 한 형만이 매번 준비를 안 해오는 것이다.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도 계속 준비를 안 해 왔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해서 뒤풀이까지 열심히 있다가 가는데 텍스트를 안 읽고 온다. 몇 번의 모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다정하고 열심히 참석하는 형이 글을 모르는 것이었다. ‘이런 바보. 왜 나는 노동자들이 당연히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미안했다. 이후로 나는 노동자를 만날 때 절대로 약자(줄여서 말하는 것)와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필자는 이렇게 어줍지 않게 세미나를 지도한다면서 큰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 수업이 있은 지가 올해 20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하고 투쟁하면서 만든 노동조합도 올해 창립 20주년이다. 작은 공장에서 20년 동안 노동조합을 유지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연말에 이 노동자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올 노동조합 20주년에는 당시의 사람들을 다 모아보자고 했다. 필자를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해준 사람들이다.

  * 이글은 시민사회신문 <내 인생의 첫 수업>에 기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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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날 사진 몇장

    2009/09/04 15:42
    몇해전에 시민사회신문에 '내 생애에 첫수업'이라는 글을 슨 적이 있었습니다. 신문사에서 이글을 모아 출판을 한다고 당시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사진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분위기여서 사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노동조합간부들과 야유회갔던 사진입니다.> <산에 갔을데군요. 월악산이 아니었나 싶은데...^^> <저녁이면 이렇게 놀았지요ㅎㅎ> 몇몇 어린 친구들도 40이 넘었고 당시 형들은 이미 50이 넘어갔네요. 이렇게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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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점
    2008/01/07 17:40
    오~ 감동적입니다. 진심으로...(행여 못 믿으실까봐)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용어 써가며
    그걸 위세로 여기는 것... 참 창피한 일이지요.
    근데 그게 크게 생각 안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대요.
    글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2. 산그늘
    2008/01/07 23:57
    맨날 노는게 운동일 수 있도록 하는 힘!!!
    아무래도 술인거 같아요 ㅋㅋㅋㅋ
    맑스 할배만큼 가슴뛰게할 사람 어디 없을까요
  3. 아야
    2008/01/08 00:03
    굳이 자본론을 읽지 안나도, 세미나를 하지 않아도 인간의 사악한 그 무엇 외의 것을 느끼는 사람들. 가고자 하는 곳이 같다면 오래오래오래오래 같이 갈 수 있어요.
  4. 2008/01/08 10:22
    솔직하게 저도 감동했어요.
    그런데 궁금한 건
    왜 항상,
    시민행동 멤버들은
    오짱이 먼 얘기만 하면 부끄러워할까나요 ㅎㅎㅎ
  5. 2008/01/08 10:31
    되게 감동스러웠는데(+_+)
    오타 때문에 킥킥 거리게 되네요.
    암튼 사람은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됨.
    • 푸른소
      2008/01/14 16:08
      오타는 알려주어야지.^^ 그 때 대자보쓰면 오타 투성이었는데...ㅎㅎ
  6. 2008/01/09 18:11
    나도 왠지 감동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ㅠ ㅠ
    20년.. 정말 오래전이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게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7. 색시
    2008/01/10 13:52
    벌써 20년이다.
    관영동지의 강요로 밤새워서 대자보쓰던 일...
    철판위에서 노동조합 출범식 하던일....
    막걸리 집에서 목청높여 노래부르던 일...
    낭군이 새, 영산강을 참 좋아했지...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술마시던 일...
    20년 후에 낭군과 색시는....(며느리도 모르지)
    • 아야
      2008/01/14 14:26
      언니..조심스럽게하는 말인데요.
      강요로 대자보 쓴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또는 자진해서 또는 우격다짐으로 먼저 ..윽-퍽!큭.켁-
  8. 2008/01/10 17:00
    그래요.
    학생 땐 늘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멋있다고 폼잡았는데,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나 읽고 이해하게 쓰지 않으면 그건 글이 아니다.
    뭐 이런 생각...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으로 내글을 다시 읽어보지요.
    겸손...까지는 모르겠는데 남들이 읽게 쓰는 것이 글이잖아요? ㅋ ㅋ
    그런데도 늘 엉망이지요. 뭐.^^
  9. 2009/09/06 13:15
    사알짝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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